예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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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종은 고려의 제16대 왕으로, 숙종과 명의왕후의 아들이다. 1105년 즉위하여 여진과의 갈등, 9성 반환 문제, 외교 관계, 내치와 문화 발전에 힘썼다. 여진 정벌을 위해 윤관에게 별무반을 이끌게 했으나, 9성을 여진에게 반환했다. 송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유교와 불교, 도교를 장려했으며, 칠재, 양현고 등을 설립하여 교육 진흥에 힘썼다. 1122년 종양으로 사망했으며, 능은 유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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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고려)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예종 (睿宗) |
휘 | 왕우 (王俁) |
자 | 세민 (世民) |
묘호 | 예종 (睿宗) |
시호 | 명렬제순문효대왕 (明烈齊順文孝大王) |
생몰 | 1079년 2월 11일 ~ 1122년 5월 15일 |
재위 기간 | 1105년 11월 ~ 1122년 5월 |
능묘 | 유릉 (裕陵) |
왕조 | |
왕가 | 왕씨 |
국가 | 고려 |
정치 | |
즉위 | 1105년 |
즉위 장소 | 개성 중광전 |
전임자 | 숙종 |
후임자 | 인종 |
가족 관계 | |
부왕 | 숙종 |
모후 | 명의왕후 |
왕비 | 경화왕후 이씨 (敬和王后 李氏) 순덕왕후 이씨 (順德王后 李氏) 문정왕후 왕씨 (文貞王后 王氏) |
후궁 | 숙비 최씨 (淑妃 崔氏), 옹주 유씨 (Lady Eun), 옹주 안씨 (Lady An) |
자녀 | 아들: 왕치인, 왕해, 왕각관 딸: 승덕공주, 흥경공주, 딸 1명 |
기타 | |
출생지 | 개성, 고려 |
사망지 | 선청전, 개경, 고려 |
태어날 때 이름 | 왕우 |
묘호 (전) | 예종 (睿宗) |
2. 생애
예종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왕우(王俁)이다.[17][18] 1079년 할아버지 문종 재위 33년에 태어났으며, 1100년 21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17][18] 1105년 숙종이 서경의 장락궁에서 돌아오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고려의 왕위에 올랐다.[18]
예종은 아버지 숙종의 여진 정벌에 대한 서약을 소중히 보관하고 즉위 후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 정벌에 힘썼다. 1107년 윤관, 오연총 등에게 30만의 별무반 중 17만 7천 명을 주어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섬멸하고, 이듬해 동북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과 9성 방비의 어려움,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로 인하여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15년 고려의 속국이었던 동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한 후 거란(요)에 적대하자, 요(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부하였다. 1117년 금나라에서 화친을 청하는 글을 보냈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여 관학(官學)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1113년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이자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였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서를 토론하게 하였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아악(雅樂)을 도입하였다.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 담진(曇眞), 낙진(樂眞), 덕연(德緣) 등의 불교 고승들이 있었다. 이 중 담진은 1107년 예종의 왕사가 되었고, 1114년 국사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한 왕에게 설법하였다.
종양으로 병석에 눕게 되어 한달만에 죽게 되었다.[40]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 1. 여진 정벌과 9성 문제
예종은 즉위 초부터 여진과의 갈등에 직면해야 했다.[18] 11세기 말, 완안부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북아시아의 균형이 변했고 고려와의 관계도 불안정해졌다.[18] 여진족은 발해의 일부였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하며 고려를 "아버지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라고 부르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3]숙종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여진족과의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했다.[18] 주된 이유는 고려군이 보병 중심이었던 반면, 여진족은 기병이었기 때문이다.[4] 별무반이 조직되었지만, 숙종의 죽음으로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18]
예종은 아버지의 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1107년 10월, 여진족이 북동 변경을 침략하자 17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윤관(1040–1111)을 중심으로 여진 정벌에 나섰다.[18][5] 윤관은 함흥 평야를 점령하고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했다.[18] 1108년 4월, 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동북 9성을 건설하고 여진족의 물자 조달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17][18][6]
그러나 부정확한 지리 정보로 인해 고려군은 성 안에 갇히고 여진족에게 포위되었다.[18] 여진족은 9성 반환과 평화 협정을 요구했고, 1109년 5월 예종은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를 수용했다.[18][6][7] 고려는 여진족에게 조공을 바치고 군대를 철수했다.[18]
9성 반환은 이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고려를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외교적 실책으로 이어졌다.
2. 2. 외교 관계
1114년 예종은 송나라 휘종에게 개성에 있는 자신의 궁궐에서 유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중국 악기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휘종은 이 요청을 오해하여 왕실 연회 음악에 사용할 악기 세트를 보냈는데, 이 선물에는 167개의 악기와 20권의 악보 및 연주 지침이 포함되었다.[10][11]1116년에는 대규모 사절단이 송나라 조정에 파견되었으며, 428점의 악기, 의례용 무용 도구 및 교본으로 구성된 두 번째 악기 선물이 도착하여 한국의 ''아악'' 전통이 시작되었다.[12]
1115년 여진족 지도자 완안아구다는 스스로를 태조로 칭하며 금나라의 건국을 선포했다. 요나라는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예종의 대신들은 여진족이 승리하고 요나라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요청은 거절되었다.[7]
1117년, 금 태조는 예종에게 "형님"으로 인정해 달라는 서신과 함께 사신을 보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 요청에 반대했고 심지어 사신을 참수할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답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5]
2. 3. 내치와 문화 발전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 진흥을 꾀하였다.[17][18] 칠재는 오경과 주례, 무학을 바탕으로 한 7개의 강좌였다. 1119년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국학에 설립하였다.[17][18][19][20]1112년에는 빈민 구제를 위한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였고,[17] 1113년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여 국가 의례를 정비하였다.[17]
1116년에는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서를 토론하게 하였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아악(雅樂)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예종은 교육과 문화 발전에 힘썼는데, 이는 정부 교육이 사립 학교에 뒤처지는 상황을 개선하고, 여진족과의 관계로 손상된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18][21][22] 또한 불교와 도교를 지원하고,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왕실 건축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23][24]
2. 4. 불교 및 도교 진흥
예종은 불교와 도교를 장려하였으며, 재위 기간 동안 이들을 지원했다.[23][24] 특히 도교 사원인 복원궁(福源宮|복원궁중국어) 건립을 시작하여[26][27][28] 도교 진흥에 힘썼다.예종 때에는 덕창, 담진, 낙진, 덕연 등의 불교 고승들이 있었다. 이 중 담진은 1107년 예종의 왕사가 되었고, 1114년 국사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로 행차한 왕에게 설법하였다. 담진은 화엄학의 대가로서 일승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3. 도이장가(悼二將歌)
《도이장가(悼二將歌)》는 1120년 음력 10월, 팔관회 때 예종이 가면극을 보고 지은 노래이다.[41] 태조 왕건을 도운 공신이자 927년 후백제와의 공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과 김낙 두 장군(二將)을 추모(悼)하는 노래이다. 향찰로 표기되었으며, 현존하는 향가 중 유일하게 왕이 지은 노래이자 향찰로 표기된 마지막 작품이다.
4. 가족 관계
예종은 경화왕후 이씨(선종의 딸), 순덕왕후 이씨(이자겸의 둘째 딸), 문정왕후(문종의 아들 진한후 왕유의 딸), 숙비 최씨(최용의 딸) 등 4명의 왕후와 혼인하였다. 또한 은씨와 안씨 등 2명의 후궁을 두었다.[47] 순덕왕후 이씨 소생의 아들 왕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36]